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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조 국(曺 國) 부친 조변현 이사장을 잘안다. [웅동학원]정치_국내 2019. 9. 1. 18:39728x90
나는 조 국(曺 國) 부친 조변현 이사장을 잘안다. [웅동학원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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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조 국(曺 國) 부친 조변현 이사장을 잘안다. [웅동학원]
지금 "조국동란" 상황에서
100사람의 기레기 말을 믿기보다는
주변에서 직접 지켜본 사람의 말을
믿는 게 훨씬 정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.
아래는 웅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
이사장 조현빈을 곁에서 바라본 김용호 선생님의 글이다. [1978 년]
나는 조 국(曺 國) 부친 조변현 이사장을 잘안다.
1978 년 지금부터 40 여년 전 나는 사립 웅동 중학교에 영어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. 그당시 내가 사는 진해에서 웅동까지는 불과 25 여 km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, 교통편이 말이 아니었다 . 선배교사가 교통편의와 시골 정경이 괞찬다는 얘기로 실은 오지인 이 웅동에 나를 가자고 했고 나는 꾐에 빠졌다고 늘 농담한다 . 왜냐면 이때만해도 교사자격증만 있으면 시골 중 , 고 에서는 칙사 모셔갔던 시절이다 . 그래서 의창군 웅동면에 있는 오지중의 오지인 웅동중학교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. 소사 , 월남 , 마천등과 먼 용원 , 가주 , 안청 , 녹산등에서 학교까지 때론 먼 길 걸어오던 제자들은 이제 그들도 50 줄이 되어 지역의 어엿한 장년인 그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줄 땐 기분이 참 좋다 .
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에 진해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는 유일한 이 도로는 명색이 군사도로인 데도 한시간여만에 한대씩 오는 시외버스는 시간 맞춰오면 다행이지만 30 분정도 연착은 보통 이었고 1 시간 연착정도면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어쩔수없는 지각이지만 핀찬듣기 일쑤였다 . 그때는 교사가 자가용 가진다는 것은 백에 1 명 이었다고나 할까 .
다른 비포장도로와는 달리 군사용이라 길에는 자갈을 전부 깔아놓아 ( 아마도 탱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위함인듯 ) 곡예하는듯이 구불하고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려온 버스에서 내리면 옷맵시는 뒤죽박죽이고 몸은 수업하기전 진땀 으로 범벅투성 이었다 . 지금도 웅동은 그리 도시 발전이 되지않은 아주 한적한 곳이다 .
( 가짜뉴스로 웅동이 진해의 중심지 , 번화가 정도로 자꾸 나오니 타지 분들이 지금도 그런줄 알고 있는게 안타깝다 )
웅동중학교 .. 그당시 웅동 인구라야 천명을 넘지 않는 조그만 농촌마을 . 한 학년에 두세반 , 도합 8 반 . 학생은 총원 백명을 조금 넘었던 것 같다 . 그때는 농업이 전부였고 멀리 용원등지에 사는 학생들은 어업을 하는 가정도 몇몇 있었고 . 딱히
제조업 하는 곳이 아니라 , 고등학교도 없어 중학교 졸업후 자연스레 부산으로 이주하는 가정이 꽤 많았다 .
이 학교가 생긴 유래는 다른 학교와 좀 다르다 . 1919 년 기미년 3 월 1 일 , 그보다 한달여 뒤 잇 따라 4 월 3 일 , 이지역의 웅동민과 인근 웅천 민들이 항거하여 일어난 역사적 4.3 독립만세 사건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.
이 4.3 독립운동의 주역에 조변현 (조국의 부친 )의 부친 , 즉 조국(曺 國 )의 조부가 깊이 간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. 조그마한 시골에서 농민들 대부분이 가세한 웅동 4.3 독립만세 운동은 향토민들의 애국심이 남달리 강해서 어떤 지역보다 거세게 만세를 불렀던 큰 만세사건 이었다 .
충무공의 해전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웅천(熊川) , 웅동(熊東) 앞바다도 수없는 왜와의 격전장으로 인한 연유이었을까 . 일찍부터 또 역사상 웅천 . 웅동은 애국심과 애향심이 강하게 각인된 곳이다 . 대대 로 출중하고 늘름한 기상과 빼어난 체격을 갖춘 선대를 둔 웅천 , 웅동민들이 유난히도 참 많다 . 역사적으로 이름이 남겨신 분들이 유달리 많이 배출되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고 자연의 기세와와 인간의 장대함과 해산(海山) 풍광이 빗어낸 인재명당(人才名堂 )이 웅천 , 웅동이라고 주창하는분들이 많고 나도 늘 그렇게 믿고 있다 . 기운이 정말 강한 곳이다 .
4.3 운동이 있은 그 후 , 광복이 되자 지역의 주민 과 유지들이 해방의 기쁨과 함께 기념비적으로 예부터 선교사가 만든 서당같은 작은 1908 년의 계광학원을 순수 자발적 모금에의해 공민학교로 만들게된게 오늘의 웅동중 이다 . 그래서 웅동중은
1985 년까지 조국의 부친께서 이사장으로 되기 전까지 계광학원 ( 웅동중학교 ) 은 특별히 설립자도 이사장도 있는 게 아니었고 또 점심 한그릇 먹기 힘든 이사나 이사장을 할려는 이도 없이 그저 시골 의 조그마한 중학교로 주인을 따지자면 웅동의 주민이 주인이고 설립자이고 이사와 이사장 이었 다 .
해방후 중학교 틀을 갖추자 초대 교장선생님으로 정의화 전 국회의장의 부친인 정윤호님 이셨고 정의화의장께서도 웅동중학교 사택에서 출생한 것에 늘 자랑스럽게 얘기하신다 . 어찌보면 김영삼정부에서 발탁된 부산 봉생병원의 원장인
정의화의원도 합리적보수에 해당되는 사람이었 을거라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인품이 인 자하고 너그러웠다 . 국회의장 이었을때도 상대인 현 민주당을 인정하고 협력하며 국회를 부드럽게 이끈 것도 기억에 남는다 . 필시 웅동의 기운을
받았을 것이다 .
그 뿐만이 아니다 .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배명인 과 3 선 국회의원을 지낸 배명국 , 두 형제 또한 웅동이 고향이다 . 다방면에 명성을 남긴 웅동 출신이 무척이나 많다 .
부(父)를 애국지사로둔 조 국의 아버지 조변현은 웅동에서 태어나 진해의 친척 집에서 고교시절을 보냈고 그후 부산으로 나가 건설 . 철강회사 ( 고려 종합건설 ) 를 설립해서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. 조 국의 모친이신 박정숙 전 이사장도 웅동에서 태어나 진해에서 여고를 나오셨을거다 .
내가 웅동중학교에 처음 부임한 날 , 비가 조금 내렸는데 놀랍게도 학교는 개천변에 그대로 지어졌던 터라 운동장은 금새 물이 찼다 . 그로부터 신입인 나는 비가내리기만하면 ' 오늘도 신발이 다 젖는구나 ' 하고 늘 그렇게 개천변에 세워진 학교 가 안스럽기까지했다 . 벽면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학생들이 걸레로 닦고 훔치고ᆢ .
그당시 대부분 사립 중학교의 재정은 열악했다 . 교사의 월급이 제때 나온 적은 그의 없었다 . 웅동 과같은 오지에 사립중학교가 있은 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. 오늘에야 사립중 . 고는 시 , 도 또는 국가재정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, 그당시의 시골사립의 재정자립이란 설립자가 대단한 재산가든지 아니면 설립자의 어떤 숭고한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.
웅동 중학교는 정말 특이했다 . 학교를 공립화하면 되는 것인데 , 주민들이 돌아가며 이사를 선임하고 학교장이 이사장을 겸임하고 , 학교 건립한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만 있었지 , 주민들이 이사인 그분 들은 농사짓기에 바빠 이사회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었고 그렇다고 공립화하는데는 극구 반대 했던 실태였다 .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사장 없는 형태의 학교였다 . 그래서 개울가에 세워진 이 학교에 관심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.
그래서 그당시 교장 ( 성창근 ) 선생님은 출향해서 성공한 동향인들을 늘 찿아나셨다 . 교사들의 급료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. 애국 , 애향심에 의해 학교는 설립했으나 , 뚜렸한 설립자나 이사장 없는 학교를 재정적으로 이끌어 가기는 어려웠다 . 그리고 웅동민들은 그들의 십시일반 모금에 의해 설립된 학교에 애착은 가지고 있어 쉽사리 공립화 하는데는 반대만하고 , 그렇게 운영이 되어왔다 .
오직 한분 , 조 국의 부친 조변현 . 그당시 고려종합 건설사장이었던 이분은 매달 한 두번씩 학교를 방문하셔서 학교재정에 막대한 기여를 하셨다 . 1970 년대 , 80 년초 이분은 학교의 이사도 아니 었고 단지 고향민의 한사람으로 고향학교에 도움 을 주고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부산을 오갔다 .
부산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조변현사장은 그당시 제정적으로 열악한 고향의 중학교가 내심 안타까 우셨을거라 여겼을거다 . 또한 조부의 형제분이 계광학교의 교사였다가 만세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뤘으니 , 대단히 애국심이 강한 분이셨을거고 .
머리가 유달리 하얀 인자한 고향사업가의 선행이 알려지자 이참에 주인없고 열악한 웅동중학교를 모든 웅동주민이 나서서 맡아달라고 했지만 그는 이사나 이사장만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.
조변현님은 키가 훤칠하고 늠름하여 우리 선생들은 ' 젠틀맨 조 ' 라고 불렀다 .조국은 부친을 쏙 빼닮아 요즘 TV 에 나오는 그를 보자면 부친을 보는 것과 별반 다름없다 .
1985 년인가 되는 해이다 . 재정적으로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웅동중을 공립학교로 해야될 순간에 이르렀다 . 다시한번 마지막으로 주민 전체가 주인인 웅동민들이 간곡하게 조변현을 찿아가 이사장직을 맡아주기를 바랬다 .
그때만해도 한국 제일의 부호 동명목재 사위 인 배명인 전 법무장관도 , 봉생병원장의 부친인 초대교장 정윤호 ( 정의화의원의 父 ) 에게도 주민들이 찿아가 맡아주기를 부탁했으나 받아 들여지지않았다 . 수많은 성공한 동향민에게도 자선사업에 해당되는 그당시 웅동중 이사장직에 관심을 두기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었다 . 마지막 간곡한 주민들의 마음이 통했을까 그분 은 마지못해 이사장직을 수락하셨다 . 상당히 재정적 희생이 따르는 결정이었다 . 1986 년의 일 이었던 것같다 .
다시말해 애국심 강한 웅동민들이 냇가에 설립한 벽돌단층 , 지붕은 낡은 스레트 , 8 개교실의 그 학교에 조국의 부친께서 웅동을 사랑하셨기에 그 어려운 시기에 성공한 동향민 어느 누구도 관심가져주지않던 상황에서 자선(自善)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분을 오늘의 조국사태에 허위로 , 온갖 루머로 땅투기로 매도하는 것은 절대로 보아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싶다 .
온갖 허위사실로 조변현님을 끌어내리려는사람 들과 웅동에 한번도 와보지도 않은 작자들이 유투브로 날조하고 덩달아 조작을 일삼는 자들은 그당시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많은 웅동중 졸업생을 함께 욕되게함이다 .
평당 수천원에도 거들떠보지않았던 개울천 학교부지가 원래 금싸라기라든지 수백만원 한다든지하는 허위가 마치 이제는 당연하듯 부풀려져 , 조국은 광야에 버려진 한마리의 양처럼되어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.
작금의 조국사태가 어떻게될지 모르지만 , 적어도 부친인 조변현님의 학교 사랑 , 웅동 사랑이 진실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똑바로 잡아주어야 할 증인은 웅동중 졸업생 여러분 이라 나는 확신한다 . 여러분의 진실된 증언이 이번 사태를 올바르게 알리는 일이 될 것이다 .
바라건데 지금껏 배출된 수천명 웅동졸업생중 한명이라도 이글을 읽게되면 여러분이 정의에 서서 올바른 증인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.
고 조변현님께서 전 사재를 털어가며 개인적 이익을 취할려고 한 것이 한줌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리라 확신하고 웅동을 사랑한 그분의 진정함과 진실이 이 참에 드러나기를 이 지역을 지켜가는 중심에 선 웅동중 졸업생과 함께 지켜볼 것이다 . 또한 그분의 숭고함이 밝혀지는 더없는 기회가 되어서 마치 제 2 의 논두렁시계가 되지않았다는 진실을 , 웅동중 졸업생들이 두눈 부릅뜨고 정의에 서서 앞으로도 계속 살펴 봐주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.
ㅡ 1978 년 웅동중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김용호선생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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